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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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시점에 도착한 동수는 여느때와 같이 정해진 일들을 착착 진행했다.

여느때와 같은 동수, 하지만 여느때와 다른 동수. 그것은 바로 선화때문일 것이다.

잊고 지냈지만 지워지지 않았던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고 동수는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마음은 조급해졌고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른 채 선화를 가게에 나타났다.

그녀는 동수의 거울 안에서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비록 색상이 틀리기는 했지만 동수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코디네이션이었다.


인사를 나누며 동수는 당장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모한 발상을 따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선화는 매장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손님이 고른 물건을 포장해주기도 하면서 동수와 호흡을 맞추었다.

그녀를 보면서 동수는 영권의 자리를 차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세요?"


동수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일정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야."


조용히 대답하는 선화. 그러나 얼굴이 밝지가 못해서 동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어디로 여행을 갔기에 일정이 정해지지 않은 걸까.

동수의 이성은 왜곡되어 있었기에 선화를 바라보는 눈길은 보통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바라보기를 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동수에게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으며 그녀를 포기하고 잠잠해지기란 아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도대체 그 무엇이 선화를 그의 뇌리에 각인시킨 것일까.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사건은 가게문을 닫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고야 말았다.


선화는 진열되어 있던 상품을 정리하기 위해 접는 사다리를 펴 놓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일하고 있었고 동수는 그 옆에서 매장 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커다란 인형을 선반의 꼭대기로 가져가던 선화는 힐때문인지 사다리 위에서 중심을 잃었고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동수는 순식간에 그녀 곁으로 달려갔고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는 그녀를 무사히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충격때문에 동수는 뒤로 밀리면서 진열대 모서리에 팔을 찧었고 붉은 피가 주르르 흘렀다.

그런 것도 모르고 선화에게 괜찮냐고 묻던 동수를 역으로 선화가 보고는 많이 놀란 듯 했다.


"동수씨 괜찮아? 피가 많이 난다."


선화가 얼른 손수건을 가져와 동수의 팔을 감싸며 물었다.


"괜찮아요. 언제 그랬지. 아픈 줄도 몰랐는데."

"병원에 가봐야겠어. 많이 찢어졌어."


선화는 잠깐 동안 동수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도 잊고 걱정이 앞섰다.

동수는 괜찮다며 하던 일을 계속했고 문을 닫을 때까지 병원같은 데는 안 같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그러지 말고 같이 병원에 가자니까."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사모님."


또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말았다.


"사모님은 무슨. 그럼 우리집에라도 가서 간단하게 치료를 하자. 자취하는 방에 소독약도 없을 거 아냐."


뜻밖의 제안에 동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같이 타고 가요."


동수가 말하자 이번에는 선화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하고 선화는 동수의 허리를 잡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뛰는 만큼 오토바이의 엔진도 거칠게 타올랐다.

동수는 뽐내기라도 하듯 한껏 스피드를 올렸고 그럴수록 선화는 동수의 등에 바짝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자 동수는 너무 기뻤고 계속해서 달리고만 싶었다.

선화의 아파트에 도착하고 오토바이에서 내렸을 때 선화는 약간 상기된 듯 했다.

그녀는 말없이 집으로 향했고 동수는 영문을 몰라 뒤를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선화는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빨리 달려. 위험하잖아."


그제서야 동수는 선화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았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천천히 다녀. 오토바이는 아무래도 위험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동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집에 함께 들어서는 두 사람.

동수는 자신의 허름한 자취방에서 나는 냄새 대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에 감동했다.


"잠깐 앉아서 기다려."


동수가 거실에 앉아서 집 구경을 하고 있는 사이 선화는 방에 들어가서 소독약을 꺼내왔다.

손수건을 푼 선화는 역시 병원에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병원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동수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마실 것을 내왔다.


"한가지만 약속해줄래?"


선화가 물었다.


"뭔데요?"


쥬스를 마시던 동수는 사래가 들뻔했다.


"오토바이 조심해서 타겠다고.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어."


그녀가 걱정을 한다니 동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무도 자기에게 그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는데.


"알았어요. 약속할게."


둘은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동수의 거울 속에 있는 선화는 다시 옷을 벗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동수를 보며 선화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녀에겐 동수 또래의 남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죽은 건 7년쯤 되었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동수는 그녀가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면서 동수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바보같은 놈, 그런 것도 모르고. 감정이 커진 동수는 선화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속도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저기..."


이번에는 동수가 말을 꺼내려 했다. 선화는 뭐냐고 물었다.

지금 말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선화는 동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혔던 맑고 넓은 호수의 눈망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래. 그렇게 해. 동수야."


선화는 마치 동생의 이름을 부르듯 대답했고 동수는 진짜 동생처럼 해맑게 웃었다.

돌아가기 싫었지만 떠나야 한다는 것을 동수는 알았다.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자고 가라고 말하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잘 자, 누나."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동수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동수는 잠시 후 오른 손으로 애꿎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내리치며 이마를 부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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