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남자들의 상상 - 상편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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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그냥 흘러갔다.

선화는 영권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라는 사실도 잊고 지내고 있었지만 경찰이 신고를 하는 것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마친 셈이었다.

가게를 지키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수가 그의 집으로 초대를 한 것은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져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했던 날이었다.


"오늘 우리 집에 놀러 갈래요? 누추하지만."

가게 문을 닫고 갑작스레 물어오는 동수의 제안에 선화는 망설일 새도 없었는데 그가 벌써 안전 핼맷을 그녀의 머리에 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화는 거부할 의사도 없었지만 그럴 기회도 갖지 못하고 동수의 뒷자리에 앉았고 오토바이는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기온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선화는 동수의 등에 더 꽉 매달렸고 동수는 그녀가 싫어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조심스럽게 달려 나갔다.


"집이 누추해서 초대하기가 쉽지 않았어."


집 앞에 도착하자 동수가 선화를 내려주며 말했다.


"괜찮아. 이런 곳에 살고 있구나."


선화는 말했고 녹이 슨 철문을 지나 동수의 방으로 가는 동안에 동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선화도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는데 친동생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자취방에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으- 춥네."


방안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는지 선화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동수가 얼른 보일러의 버튼을 눌르자 바로 밖에서 우르릉 하며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수는 낡은 방석을 놓으며 선화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케익을 꺼내와 초에 불을 붙였다.


"오늘 무슨 날이야?"


동수는 아무 대답도 없이 빈잔에 샴페인을 따라서 선화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건배해요."


동수가 말했다.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그의 바램대로 선화는 순순히 건배를 하고 샴페인을 마셨다.


"왜 분위기 잡고 그래? 무슨 날이야?"

"아니. 그냥 잠시 누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동수는 끈적한 시선으로 선화를 바라보았고 선화는 무안한 듯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동수는 무릎으로 방바닥을 미끄러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선화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잠깐 동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동수의 얼굴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로 향했을 때 약간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냥 그랬을 뿐 선화는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았고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동수의 팔이 선화의 어깨를 감쌌고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며 두 사람은 몸 전체에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끝이 없이 이어지길 원했던 동수의 바램과는 달리 짧은 첫 키스는 선화의 경직으로 끝이 났다.


"그, 그만."


선화가 가볍게 동수를 밀치며 입을 가렸다.


"누나, 사랑해."


그렇게도 말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하면서 동수는 선화의 손을 움켜 쥐었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는 선화를 동수는 다시 한번 품에 안았다.

선화는 두 팔을 오무린 채 있었지만 동수를 밀치지는 않았다.

사랑에 목말라 있던 탓일까. 동수에게 밀려 넘어지고 만 선화는 조금은 동수를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서툴게 목을 애무하고 귀에 속삭일 때 간절하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선화는 끝내 동수를 밀어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나 정말 누날 사랑해."


선화의 몸에서 떨어져 앉은 동수가 말했다.


"아냐. 그건 진짜 사랑이 아냐. 그냥 만지고 싶고 빨고 싶고 그런 거지."


선화의 말에 동수는 당혹스런 맘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간절히 그녀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거라고."


동수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선화에게 달려 들었다.

거칠게 달려드는 무모함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은 선화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동수의 몸이, 그의 사랑이 집요하게 자신을 원하며 파고들 때 그녀의 몸은 배고픈 위장처럼 꿈틀거리며 그 느낌에 젖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 동수는 점점 더 깊숙한 곳까지 허물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다는 아찔한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한번 매몰차게 동수의 몸을 밀어내고 말았다.


"이제 그만 하자."


선화는 일어나 앉으며 옷매무새를 챙겼다.


"누나."


동수의 목소리가 애절했지만 선화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만 갈게."


동수가 따라 나올 틈도 주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온 선화는 달리기 시작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달리려니 무척 힘이 들었지만 쉬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큰 길로 나온 선화는 택시를 잡아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동수는 상실감과 아쉬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얼른 따라가서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마 그랬다면 그녀는 자신을 더 미워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동수는 그대로 방에 쓰러져 눕고 말았다.


이제부터 그녀를 어떻게 바라본단 말인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졌다.

손가락 하나 뜻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동수는 어느 순간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몸이 가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동수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헬맷도 쓰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그녀와 약속을 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잠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금 전에 선화가 지나갔던 길을 동수는 질주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불안함도 커져갔다.

그녀가 만나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앞으로도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지만 불안함의 높이 만큼 그의 결심도 단호했다.

동수의 오토바이가 밤 거리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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