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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상상 - 상편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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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 영권은 가게를 지배인 격인 동수에게 맡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퇴근한 지 얼마 안 되는 듯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청소와 빨래에 매달려 있는 불쌍한 사람.

아내를 속인다는 생각에 영권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모임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가려고. 옷 좀 갈아입고 갈게."


영권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입고 있던 옷을 세탁기 옆에 놓았다.

아내에게 일거리를 하나 더 늘려준 셈이다.


"언제쯤 돌아와요?"

"글쎄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어. 늦으면 전화할게. 기다리지는 말고."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영권은 아내와 가볍게 포옹을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선화는 베란다에 서서 차에 올라타는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문뜩 자신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스쳐 가는 생각일 뿐 현실에 묶여버린 선화에게 그럴만한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 청소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를 놓고 간 모양이다. 남편일 거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누구냐고 물었다.


"저, 조병흽니다."


남편의 친구인 병희였다. 선화는 조금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선화 씨."


문을 열자 낯이 익은 병희가 인사를 해왔다. 그는 영권의 대학 동창인데 몇 번 본적이 있는 터였다.


"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영권씨 금방 나갔는데."

"아! 그래요? 나간 지 얼마나 됐죠?"

"한 30분쯤 됐을 텐데…."

"이런…."


대화를 나누던 병희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알겠다고 말하거나 잘 있으라고 말할 시간이 된 것 같았지만 그는 계속 우물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화는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겠습니다."


병희는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검은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사람치고는 단정한 편인 것 같았다.

머리도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게 만날 약속이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약속하고 오신 거예요? 오늘 무슨 모임이 있어서 나간다고 했는데 같이 만나는 건 아닌 모양이죠?"


선화는 거실과 이어져 있는 부엌에서 차를 탈 물을 준비하며 물었다.


"아뇨. 약속은 안 했어요. 그냥 지나는 길에 친구가 생각나서. 어떤 모임인지는 모르지만, 저와는 관계없는 모임인가 보네요."


거실을 둘러보던 병희의 시선이 선화의 뒷모습에 머물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어서인지 결혼하기 전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머리를 뒤로 묶어 하얗게 드러난 목선, 그 두 배쯤 될 것 같은 얇은 허리선과 반쯤 되어 보이는 가늘고 긴 다리.

그것들을 조화롭게 이어주는 균형 잡힌 몸매가 집에서 입는 허름한 옅은 분홍색의 원피스 안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유를 외치는 아름다운 육체를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억압해 놓은 것 같았다.


웬일인지 병희는 선화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어떤 감정이라도 느끼는 듯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적의를 감춘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맹수 같기도 했다.

차를 준비한 선화가 돌아서자 병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것처럼 했다.


"그동안은 소식이 뜸하셨던 것 같아요. 영권 씨가 얘기하는 걸 못 들은 것 같은데."


선화가 테이블 위에 잔을 놓으며 마주 앉았다.


"네. 그냥 좀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잘 지내셨죠?"

"네."


그리고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여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차를 홀짝거리는 소리와 소리 없이 선화를 힐끔거리는 병희의 눈초리.

선화도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동안 병희는 선화의 앞모습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은밀한 곳에 숨겨진 가슴과 가녀린 두 손이 사뿐히 놓여 있는 무릎,

다 가리지 못한 일부의 허벅지와 쭉 뻗어 내려오는 종아리,

하얀 발목. 병희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었다.


"과일이라도 드릴걸."


선화가 말을 꺼내는 동시에 병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그만 가보려고요. 차 잘 마셨습니다."


그렇게 되지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어색한 만남을 접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병희는 자기 구두가 놓여있는 현관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천천히 선화가 따라갔다.


"그럼 안녕히."

"네.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려던 병희는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선화에게 건넸다.

"도울 일이 있으면 찾아오세요."

"네. 그럴게요."

"선화 씨에게 드리는 겁니다."


병희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명함을 받아서 든 선화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며 문을 잠그고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세탁물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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