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오빠의 노예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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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다른 남자한테 다정하면 싫어요?”


굳이 이렇게 짚어서 그의 속을 후벼파는 영아였다. 


확실히 영아는 달라졌다. 영아는 더 이상 그의 말이라면 별처럼 눈을 빛내던 순종적인 소녀가 아니었다. 

영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훌쩍 자라 버렸다. 

그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불편했다. 영


아를 향한 그의 감정은 처음부터 너무 복잡했지만 그녀를 멀리했던 1년 동안 더 심해졌다. 

영아가 그의 손이 못 미치는 곳으로 영영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두려움까지 증폭되었다. 


이 비슷한 감정은 정신적인 동반자였던 부친을 잃었을 때 알았던 감정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충격적이었다. 


그는 여섯 살 때 부친을 처음 알았다. 

그를 버렸던 생모가 죽음을 앞두고 그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그 후 부친은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처음에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지만 부친의 진심을 느낀 후부터 부자 사이가 각별해졌다. 


뿌리 없이 살았던 그에게 부친은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겨우 그가 마음의 문을 다 열었을 때 부친은 사라져 버렸다. 

예고도 없이 떠나보낼 준비도 주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온전히 믿게 해놓고 다시 그를 외롭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슬픔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부친을 대신해서 모친을 보살펴야 했다.


사실 모친은 부친을 잃기 전까지는 불편한 존재였다. 


당시 결혼 2년 차였던 모친은 불임 진단을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난데없이 남편의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친은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게 어린 그의 눈에도 다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친을 잃고 난 후 모친은 그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그도 어려웠던 모친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친에게서 느껴지던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은 모친으로부터 얻기는 힘들었다. 


그러다 영아를 만났고, 그 순간 그는 이상한 활력이 생겼다. 

하루하루가 흥분의 연속이었고, 부친을 잃은 후 처음으로 기대감마저 생겼던 것이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혼란스러웠고,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인정하고 난 후, 그는 혼란을 넘어서 지옥을 겪었다. 

하지만 빠져나오려고 애쓸수록 그는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 가운데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영아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꼴을 보느니 세상의 몰매를 맞고 죄인이 되는 게 낫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가진 신념과 명예와 부, 지위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영아가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는 것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전자는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상실감이지만 후자는 그 의지조차 무너져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크나큰 재앙이었다. 


그는 영아가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게 지난 1년간 그가 깨달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응, 싫어. 넌 내 여자니까.”


영아의 첫 남자도 그였고, 하나뿐인 연인이고 싶었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여자한테 한 번도 소유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영아는 그가 상상도 못 한 강한 소유욕으로 이성을 잃게 뿌리째 흔들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영아를 소유했던 남자를 본다면 죽이고 싶을 것이다. 

영아가 다른 남자한테 이처럼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낸다면 그의 온몸이 산산조각 나 피가 마를 것 같았다.


“글쎄요.”


영아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파스타를 포크로 뒤적거렸다. 그 확신 없는 대답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난 네가 필요해. 너도 마찬가지고.”


그의 확고한 검은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가을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너에 관한 한 원칙이란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3년 운운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언변으로 먹고사는 그가 이 작은 여자한테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어설프게 굴다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아파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조차도 납득이 잘 되지 않으니 그녀를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활활 다 타고 나서 재만 남으면 우린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는 그럴 일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아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은 부족했다. 

영아는 그만큼 세상 풍파를 겪지 않았고, 남자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기준으로 보자면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좀 더 어른인 그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상이기를 포기했다. 

그녀 없이는 죽을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알았다. 태생부터 외로웠고, 그 외로움이 지독한 갈망을 키웠다. 

그의 굶주린 영혼은 이기적인 포식자였다. 

그의 허기진 삶을 채울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영아였다. 

그걸 알아 버렸는데 여실히 깨달았는데 그녀를 놓아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자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지.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왜 미래에 집착해? 우리한테는 근사한 현재가 있는데.”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눈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의도했던 밝은 빛이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는 그늘이 졌다.


“알겠어요. 우리에게 내일이 없으니 오늘만 충실하자는 거죠?”


“오늘만이 아니라 오늘도라고 생각해. 난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나만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느껴.”


뭔가 이해하는 듯한 영아의 눈빛을 본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그의 눈치를 봤다.


“미안해요. 우연히 오빠가 보육원에서 자란 이야기를 부모님이 하는 걸 엿들었어요.”


혹시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직접 화제로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역시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아니까, 비밀을 갖고 싶지 않았다.


“언제?”


“오빠 서른 번째 생일에요. 부모님은 생일 파티를 해주고 싶었는데 오빠가 출장 중이라 집에 못 온다는 전화 받고 아쉬워서 이런저런 과거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일찍 집에 와 있는 걸 몰랐던 거예요.”



사실 생일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그때도 출장 중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님은 물론이고 영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이 모친에게는 아픔이었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에 늘 불편했다. 그러니 생일은 되도록 본가를 가지 않았다.


“충격받았겠네.”


“아뇨, 충격보다는 모자 사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서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죠. 뭐 그렇다고 안쓰러운 마음이 질투심을 없애 주지는 않았지만.”


“질투심?”


태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그녀가 그를 노려봤다.


“그 소식 듣고 오빠한테 전화했는데 유진이 언니가 받더라고요.”


난데없는 공격을 받으니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빼지도 보태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 것 같았다.


“사실 아파서 정신이 없었어.”


“어디가요?”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묵은 화가 가라앉고 걱정으로 가득 찼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몸살을 앓았어. 보통 때는 생일이면 혼자 지내는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성가신 간호를 받게 된 거지. 비서를 통해 소식을 듣고 왔더라고.”


비몽사몽간에 영아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들었을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 후 더 이상 모르는 척 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영아를 여자로 원했고, 이제 성인이 된 그녀의 주변에 남자가 생길까 봐 급격히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바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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