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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정사 - 5장. 거미 여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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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달수가 비로소 하늘처럼 우러러 보였다. 그가 지시하는 일이란 무슨 일이든지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벌써 6개월 전의 일이었다.


풍원건설 경리 부장 배 명길은 비서실에서 내려온 메모를 보고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언제나 같은 스타일이었다.

겉봉에 대외비라고 붉은 스탬프가 찍혀 있는 그 메모는 비서까지 볼 수 없게 사장의 직인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미네르바 호텔 커피숍, 비자금 1천만 원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에게 6시까지 전달`


메모는 달랑 그것뿐이었다.

메모의 내용으로 봐서는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필체가 달인인 점으로 미루어 사장의 친필이 분명했다.

사장의 친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사장으로부터 특별 지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경리 파트의 그 누구도 모르게 비자금을 관리하라는 지시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만 관리지 비자금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메모를 다 읽고 봉투에 넣어 테이프를 붙인 뒤 그의 직인으로 봉인했다.

여비서가 볼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제기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는 배알이 뒤틀려 여비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마네킹처럼 예쁜 여자였다.

그러나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가슴이라든가 풍만한 둔부는 이미 사내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미스 현이던가?"


그는 봉투를 여비서에게 건네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6개월쯤 전에 새로 들어온 비서였다.


"네"

"미인이야."

"감사합니다."


여비서가 사뿐히 고개를 숙였다.


"농담인데 뭘 그래?"

"네?"

"미스 현 앞에서는 농담도 못 하겠어."

"어머!"


여비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장실의 여비서에게 수작을 걸어 두는 것이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언제 술 마시러 같이 갈래?"

"네"


여비서가 선선히 대꾸했다.

맹랑하다고 할지 그냥 인사치레하는 대답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대답을 올가미로 여비서를 구워삶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럼..."


여비서가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여비서의 몸에서 문득 고급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는 여비서가 그의 방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캐비닛을 열고 현금 1천만 원을 꺼내 007가방을 들고 현관 로비로 내려갔다.


"차 한 대 끌어내시오."


그는 경비과장에게 지하 주차장에 있는 회사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가을이라 해가 유난히 짧았다.


경비과장이 직접 차를 끌고 올라왔다.

그는 경비과장이 내리자 직접 핸들을 잡고 호텔 미네르바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텔 미네르바는 관악산 골짜기에 있었다. 신림동 저 안쪽이라 풍광이 수려했다.

그는 호텔 종업원에게 차를 맡기고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일찍 나오셨군요."


그는 여인에게 목례했다. 6시가 되려면 아직도 10분이나 남아 있었다.


"배 부장 오는 걸 보려고요."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이 입꼬리에 미소를 달았다.

그녀는 울을 소재로 한 분홍색 니트 차림이었다.


"영광입니다."


그의 대꾸엔 약간의 비아냥 끼가 묻어 있었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예"


그녀가 웨이트리스를 손짓해 불렀다.

그는 비엔나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샐러리맨 생활이야, 늘 개미 쳇바퀴 도는 식이죠."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자가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불야성`이라는 술집 이름이 새겨진 라이터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우린 어차피 동업자예요."

"동업자요?"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저야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도 모르고요."

"모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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