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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정사 - 3장. 가을 소나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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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농로로 꺽어들었다.
 

벌써 농로 양쪽엔 벼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 산들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벌써 벼를 벨 때가 되었구나."


아버지가 차창으로 누렇게 고개를 숙인 들판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황금빛 들판이었다. 군데군데 허수아비가 울긋불긋한 줄을 매달아 참새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폭풍이 불던 밤에 농로로 들어오던 승용차 한 대가 생각났다.

그 속에 여자 한 명과 남자 셋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혹시 범인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이 범인이라고 해도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다만 차 안에서 그녀를 향해 무엇인가 던지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 왔다."


택시는 어느덧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클랙슨을 눌렀는지 어머니와 보영이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보영이가 택시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소복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택시에서 내렸다.


"고생 많았지?"


어머니가 눈물이 글썽한 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왜 가슴이 답답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집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직도 집안 구석구석에 남편과 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옷가지며 그들이 쓰던 물건들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살피며 또다시 가슴이 묵직하게 저렸다.


그녀는 친정어머니가 차린 늦은 점심을 먹고 2층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바람을 쐬었다.

남편이 쉬는 일요일이면 곧잘 그 의자에 앉아서 몸을 흔들며 얘기를 하던 곳이었다.


"바람이 차지 않니?"


아버지가 올라온 것은 그녀가 그 의자에 앉아서 한 시간 정도 기계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요."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좀 앉으세요."

"그럴까?"


아버지가 흔들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참 편하구나."

"그이는 여기 앉아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고 했어요."

"그래, 정말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오랫동안 정원에 피어 있는 붉은 깨꽃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얘!"


아버지가 입을 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네?"

"너 우리하고 합칠래?"

"합쳐요?"

"우리하고 같이 살자는 말이다. 여기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구나."

"전 여기 있겠어요."

"우리하고 사는 게 불편해서 그러니? 그렇다면 아파트를 하나 사든가, 우리 집 가까운 곳에 말이야..."

"글쎄요."

"내가 복덕방에 집을 내놓을까?"

"아버지 좋을 대로 하세요."

"그래, 그럼 내일이라도 내놓도록 하자."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에게는 가난하게 사는 시동생이 하나 있었다.

6개월 전에 뺑소니차에 치여 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원비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이 사업 자금까지 수월찮게 도와주고 장가까지 보내주었으나 사업은 빈번히 실패하고 씀씀이가 헤픈 여자는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는 문득 그 불행한 시동생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과 집을 팔아야 했다.

이튿날 친정아버지는 땅과 집을 복덕방에 내놓았다.


그녀는 2층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또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보영이와 어머니가 말동무를 해주려 했으나 그녀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복덕방에 내놓은 땅은 뜻밖에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을 매입하려는 사람들은 흉가라 하여 값을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깎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지 않겠어요."


그녀는 친정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땅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여기서 계속 살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내가 복덕방에 다니면서 들은 얘긴데 이 마을엔 요즘 해괴한 일들이 일어났대. 원인 모를 불이 나거나 동네 입구의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타고,

사람들이 죽고... 모두들 이사 가겠다고 야단이라는 거야..."

"괜한 소리예요."


그녀는 친정아버지의 말을 일축했다. 그런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때아닌 봄에 마른벼락이 떨어져 느티나무가 타 죽은 뒤 집집이 흉사가 잇따랐다.

원인 모를 불이 나거나, 여자가 바람을 피워 가정 파탄이 일어나고, 사소한 일로 이웃끼리 싸워 죽고, 고양이 사체가 담 밑에 떨어져 있고, 1년에 한두 번밖에 없던 초상이 지난달에 세 집이나 생겼다.

마을에서는 흉사가 잇따르자 마을굿을 지내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집 사건까지 터졌으므로 인심이 더욱 흉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친정 식구들은 1주일 동안 그녀의 집에서 머물다가 돌아갔다.

친정집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도 없었지만, 친정아버지의 출근 거리와 보영이의 통학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1주일 동안 내내 2층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예성개발에서 전화가 온 것은 그녀가 퇴원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이었다.

예성개발이 그녀의 땅과 집을 매입하기 위하여 내놓은 조건은 현 시가에서 1천만 원 정도 적은 액수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거절했다.


(이건 너무나 적은 액수야...)


그녀는 땅을 매입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을 얕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이 생전에 팔지 않았던 땅을 자신이 팔아 치우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시동생을 돕는 일은 남편이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나오는 퇴직금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 그날 오후에 모처럼 산책을 나섰다.

코스모스가 저녁 바람에 한가롭게 나부끼고 있는 농로였다.

그녀는 개천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들에서 풍기는 흙냄새와 풀 냄새가 상큼했다.


(여기쯤일 거야.)


그녀는 그날 밤 사내들이 자신을 향해 무엇인가 던진 길섶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도 코스모스가 한 무더기 피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향해 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빈 담뱃갑이나 성냥 같은 것은 아무 데도 버려져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먹다 버린 과자 봉지, 사탕 껍질 같은 것들만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코스모스를 한 움큼 꺾어 쥐고 돌아왔다.


이튿날 그녀는 다시 농로로 산책하러 나갔다. 그러나 그날도 역시 허탕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녀는 코스 모스 숲에서 마침내 빈 성냥갑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도 전화번호도 없는 평범한 성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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