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3섬야설) 인도에서 만난 남자 -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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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순 바람 값이네! 뭐"


은혜가 입을 삐죽거린다. 그 의견에 나도 한 표.

우리는 지금 하와마할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다.


하와마할은 바람의 궁전이란 뜻이라던가? 뭐 어쨌든 겉보기엔 굉장히 이쁘고 그래서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들어가니 이거 참. 볼 것이 하나도 없네.

단지 꼭대기에서 바람을 쐬는 것 밖에는.


"하하. 이거 인도사람들은 난쟁이였나 봐요? 아님. 여자들만 이 궁전에 있었거나."


통로를 오가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인범 씨가 무안한 듯 변명을 한다.

이 사람아. 몇백 년 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작았다네. 평균신장이 백오십몇 센티 였다던가?


"그냥 숙소에 가서 쉴래요. 케이 졸라서 쇼핑하던가요."


은혜가 입을 삐죽거린다.

하와마할을 나서고 시계를 보니 다음 장소에 갈 시간이 빠듯하다.

사람들이 나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본다.


하하. 이 사람들아. 내가 길을 잃고 얼마나 헤맸다고 나를 보는가? 나도 고생했다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고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케이에게 부탁해서 쇼핑하기로 했다.

물론 거래의 조건은 오늘 저녁도 탄두리 치킨을 쏘는 거로.


"Give and take. 거래의 기본이죠. 하하"


저 녀석 넉살도 좋다. 보라 저 여우 같은 케이 녀석을.


어라. 다들 당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말란 말이야. 이쯤이면 얌체라고 뭐라고 해야 하지 않나?


"자이푸르의 별명은 핑크시티죠. 왜 핑크시티인지는 도통 모르겠고 뭐 하와마할이 핑크색이긴 하더군요.

바라나시가 비단이나 옷감이 유명하다면 자이푸르의 유명한 물품은 보석이죠.

보석은 잘 모르지만, 원석이 나쁘지는 않은데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보석가격이 아주 싸다고 합니다. 한번 보세요."


케이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반지며 목걸이 혹은 진주 등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다.


"부인께는 이런 게 잘 어울릴 겁니다."


케이가 진주를 들고 싱긋 웃는다.


"질이 조금 떨어지는 못난이 진주라 값이 싸죠."

"어떻게 내 처를?"


케이는 여전히 싱글거리지만, 눈가에 잠시 스치고 간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사진으로 봤잖아요."

"사진만으로?"

"뭐. 제 눈썰미가 뛰어난 탓이라고 할까요?"


케이는 싱글거리면서 더 이상의 답변을 거부하듯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저 녀석은 대답이 궁하면 은근슬쩍 등을 돌려버리더라. 버릇 더러운 놈.


"은혜는 뭐가 어울릴까?"


나를 향해 돌려진 케이의 등이 무척이나 완고해 보인다.

내 손엔 케이가 골라준 진주목걸이와 귀걸이가 있고 내 눈에도 이쁜이에게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How much is this?"


잠시 고민을 하다 셈을 치룬다.


***


저녁을 먹고 방에 올라가 샤워를 하고 방에 누워 있으려니 형님들이 좀이 쑤시는가 보다.

형님들은 어느새 에어인디아 마크가 찍힌 담요를 펴고 패를 섞기 시작한다.


"이리 와서 붙어."

"생각 없어요."

"돈 딴사람이 그렇게 입을 쓱 닦으면 곤란하지. 남자라면 복수전을 받아들여야지. 안 그래?"


형오 형님이 능글맞게 이야기하고 철재 형이 눈을 부릅뜨며 분위기를 거들자 같이 한판 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난번의 그들의 만행이 떠올라 은혜를 불러온다며 방을 나선다.


"은혜야?"

"왜요?"


은혜의 방앞에서 은혜를 부르니 은혜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다.


"저기 형님들이 고스톱 치자는데 너도 같이하자고."

"흠. 어쩌지.. 샤워하려고 했는데."

"그럼 샤워하고 와. 너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픽. 기다리다가 혼자 돈 잃으시려고요? 들어와서 커피나 한잔하고 기다리세요. 저기 물 올려놨어요."


은혜의 방으로 들어선다.

정확히는 케이와 은혜의 방이다. 방에 참 이것저것 살림살이가 많구나.


"커피포트도 있었어?"

"케이 꺼요. 케이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린대요.

시간 없을 때는 그냥 생수통에 커피 넣고 흔들어서 먹더라고요. 아마도 카페인 중독이지 싶어요."


샤워실을 향해 말을 던지자 물소리 사이로 은혜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케이는?"

"늦는데요. 잠깐 아는 사람 만나러 간다고요."

"커피포트 말고 뭐뭐 있어?"

"찾아봐요. 나도 뭐 있는지 잘 몰라요. 케이 생긴 거 답지 않게 꼼꼼해서 이것저것 많이 싸 들고 다니거든요."


방을 둘러보니 등산용 컵이 두 개 있어 케이 것으로 보이는 큰 컵에 커피믹스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흠. 역시 이 맛이다.

자판기 커피 다음으로 선호하는 일회용 인스턴트커피.

원래는 원두커피를 즐겨 마셨지만, 이쁜이의 취향으로 입맛까지 바꿨다.


커피를 음미하고 있는데 방구석에 반쯤 풀려있는 가방이 보인다. 저 무식하게 큰 가방은 케이 거다.

흠. 뭐가 들었는지 한번 살펴 볼까? 케이도 없고 은혜도 샤워 중이고. 뭐 잠시 살펴보는 건데.

주위를 한번 살피고 가방을 뒤적거린다.


카메라 두 대. 렌즈 4개. 엄청난 양의 필름. 건전지. 삼각대. 이 녀석 카메라 용품이 절반이군.

이건 뭐야? 하하. 이 녀석도 에어인디아 담요를 가지고 있네?


흠. 고민되는군.

마침내 찾아낸 까만색 다이어리. 족히 몇 년은 됨직하게 낡아 있다.

볼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나는 하나의 명제를 떠올린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그래 너도 사람인데 약점이 없겠어? 너의 약점을 일기 위해 너를 분석해 주마.


다이어리를 열자 19**로 시작하는 연도의 작은 다이어리용 달력이 보인다.

달력을 넘기니 흑백 사진 한 장이 나온다. 젊은 여자의 누드 사진이다.

눈에 익은데. 누구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 이쁜이인 것 같다. 아니 자세히 모르겠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 이쁜이와 닮은 얼굴이 망막을 가득 채워온다.

제기랄. 왜 이런 사진이?

왠지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아저씨?"


은혜가 샤워를 마친 양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나에게 다가온다.

정색한 얼굴이 내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케이 알면 큰일 나요. 빨리 도로 넣어요."

"저기. 은혜야."

"빨리 넣으라고요."

"알았어. 잠깐만."


케이의 가방을 정신없이 다시 쌓다.

"예전에 케이 가방 만지다가 케이가 화를 냈었거든요. 케이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 첨 봤어요.

가방에 든 물건이 케이에게 아주 소중한 것인가 봐요."


가방을 싸고 나자 은혜가 조용히 이야기한다.


"이제 고스톱 치러 가요."


결국 난 1,000루피를 잃었다. 어떻게 잃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고 지금 그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방금 본 사진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머리 한쪽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물통을 들고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파란 연기 사이로 아까의 그 사진이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호흡이라네요. 누군가가."


등 뒤로 케이의 낮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와 등을 돌리니 케이가 커피잔을 들고 내려와 내 앞에 멈춰서더니 오 루피를 내민다.

담뱃불을 붙이는 케이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 같다.


"궁금해요? 근데 안 가르쳐 줄래요. 계속 궁금하세요."


케이는 싱글거리며 담배를 피운다.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린다.

왠지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쁜이는 내 마누라라고. 나도 좀 알면 안 되겠니?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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