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야설

짐승 계약 #8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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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종료 이후 절대 서정혁에게 연락하지 말 것.>



그리고 아이에 대한 어떤 권리도 요구하지 말 것. 아마 그 조항에 대한 우려 때문에 연락 금지 조항을 붙였을 거였다.

그러니까 임신한 순간 그와의 모든 관계는 끝난다. 

임신이 확인되면 그 저택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출산을 기다리게 될 테니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희민의 하얀 얼굴이 어두워졌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갑자기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임신이나 출산, 그 모든 게 계약으로 이뤄지게 되고 그 상대가 서정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가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답답해지자 희민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그녀가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본능적으로 생각을 끊어 낸 희민이 창밖의 풍경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




정혁이 AQ 빌딩 앞 리무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블릿 PC로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자 앞에 차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그 차에서 드레스 차림의 희민이 내렸다.



연한 코랄빛의 화사한 드레스가 눈부신 흰 피부와 어우러져 드러난 어깨와 쇄골 아래까지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쪽으로 흘러내리도록 굵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칼과 전문가의 솜씨가 묻어나는 은은한 메이크업은 희민의 미모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



정혁의 시선이 희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차 실장이 뒤에 서 있는 리무진을 가리키자 희민이 곧 그쪽으로 걸어왔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다가오는 희민에게 정중히 문을 열어 줬다.



“아.”



리무진 안으로 몸을 숙이던 희민이 안에 있는 정혁을 보고 손을 뻗어 드레스 위로 드러난 가슴 부근을 가렸다.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는데.”



희민이 고급스러운 리무진 안 기다란 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정혁이 태블릿 PC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부가 조용해졌다. 희민은 턱시도 차림의 정혁을 쳐다봤다.



평소의 슈트 차림보다 더 격식을 갖춘 턱시도 복장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어깨가 넓어서인지 다리가 길어서인지, 어쨌든 마치 화보 모델처럼 근사한 정혁의 모습을 몰래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역시 정혁은 말이 없었다.



옆에 있는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업무를 보고 있는 그를 보니 드레스 차림인 자신이 괜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느껴졌다.

정적이 흐르는 차 안에서 희민은 답답함을 느꼈다.

오로지 육체적인 행위를 할 때 외에는 계속 이런 식으로 인형처럼 옆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이건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신경 쓸 가치도, 최소한의 대화를 나눌 명분도 갖지 못한 상대인 것 같다는 생각이 한편으론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이게 계약 내용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면서도 마음은 자꾸 상처를 받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대화 하나 없는 이 공간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에게 왜 서운함을 느끼는 건지.




‘이런 원초적인 계약 관계에서 연애놀이나 신혼놀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야? 한희민.’



짧은 헛웃음을 흘린 희민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도착한 웅장한 건물에는 입구부터 턱시도 차림의 남자들과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이 많았다. 

정혁과 나란히 안으로 들어가서 안을 둘러보니 세계 경제지에 나오는 재벌들이 보였다.



특히 젊은 층의 신흥 재벌들이 많았다. 

이 자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모임 같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정혁과 함께 있는 건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전용기에 탈 때도 희민은 차 실장과 따로 움직였다. 

보안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서정혁을 보는 게 생소해서 그런가?’



희민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하게 눈에 띄는 그의 외모 때문인 것도 같았다. 

갇힌 공간에서 둘만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서정혁의 분위기와 그를 보는 여자들의 시선 때문에 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훈!」



그때 정혁에게 남자들 몇몇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 온다는 소리 듣고 기다렸는데, 잘 지냈어?」


「한국은 어때? 지낼 만해?」


「여전해. 별다를 건 없어.」



친밀하게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은 정혁을 김지훈이라고 불렀다. 

여기선 서정혁이 아닌 김지훈 사장이라고 그를 불러야 한다고 희민 역시 차 실장에게 언질을 받았다.



대화를 듣다 보니 정혁은 완벽한 미국식 억양을 구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산 적이 있었나?’



그와 대화하는 동양인들 역시 미국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똑같은 발음을 구사하고 있었고 제스처도 완전한 현지인들과 같았다. 

정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그가 과거에 미국에 살았는지를 알 리가 없다.



파트너 동반 모임이라지만 정혁은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몇 걸음 뒤에 물러서서 그를 보고 있다가 희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불편해.’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은 불편했다. 꽉 조이는 허리 부근도 그렇고.



‘이런 옷을 너무 오랜만에 입은 탓일까.’



사교 파티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선 자주 입었는데 그땐 그다지 불편한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이 박힌 네크리스와 브레이슬릿,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드롭 귀걸이까지 하고 있으니 움직임도 불편하고 높은 힐도 불편했다.



어차피 정혁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희민은 주변에 앉을 곳이 있는지 둘러봤다. 

마침 근처에 기다란 소파가 세워진 곳이 보였다.



그가 찾을 수도 있으니 시야에 닿을 곳이 필요했는데 멀지 않은 거리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희민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벨벳 소파에 앉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오래 서 있던 것도 아닌데……. 긴장 때문인가.’



서정혁의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긴장이 됐다. 

저택에서 둘이 있을 땐 늘 한결같은 모습만 보이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걸 보면 더 그랬다.



익숙하게 그를 김지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정혁을 보니 희민은 다시 궁금해졌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 뿐이에요. 날 알아야 봤다 안 봤다 할 수 있을 테니.’



미국으로 오기 전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왜 정체를 숨기는 거지?’



국내에서도 외출이 잦은 걸 보면 김지훈 사장으로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서정혁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거겠지……. 

그런데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자신이 태원의 회장인 걸 숨기는 이유가 뭘까.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반대로 그 남자는?’



그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런 제안을 한 걸 보면 분명 이미 조사를 끝낸 뒤라는 걸 텐데. 그래서 그 역시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까. 

궁금한 게 없으니까.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머리 아파.’



오늘은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아까부터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두통이 일어 희민은 살짝 미간을 좁히고 이마를 매만졌다.

그때 희민의 시야에 서양 남자와 동양 여자의 커플이 보였다.



‘저 여자……는?’



순간 이마를 만지던 희민의 움직임이 멈췄다. 

저 동양 여자는 분명, 세양그룹 창립 기념식에서 자신에게 기억 속에 있던 그 말을 했던 여자였다.



SY뱅크 부사장 최지윤.



세양그룹 딸로 계열사인 SY뱅크의 부사장이지만 사실상 사장인 여자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예전 처음 봤을 때 최지윤이 자신을 소개했던 말과 주고받은 명함, 그리고 그날 행사장에서 나눴던 대화와 기내에서 내내 봤던 참석 명단에 있던 이름까지 동시에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희민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선 침착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희민은 최지윤을 살폈다. 

그녀는 서양 남자의 파트너로 온 모양이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남자의 팔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는 최지윤을 보며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전 사내 행사에서 한번 명함을 주고받았던 일 외에는 창립 기념일 때 봤던 게 처음이었다.

회사 사주의 딸이다 보니 먼 곳에서 임원들과 같이 있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인사도 나누지 않았었다.

자길 기억할지도 의문이었고.



‘그 외에 전에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을까?’



만약 자신의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게 맞는다면 분명 다른 연결 고리가 있을 거였다. 

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최지윤의 얼굴을 아무리 봐도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은 희민에게 절망적이었다.



그때 최지윤과 남자가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잡았다.



“아…….”



멈칫한 희민이 돌아보자 정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요. 한희민 씨.”



건조한 음성으로 그가 말하는데 희민이 다급함이 담긴 눈으로 돌아봤다. 최지윤은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어차피 말을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따라간다 한들 물어볼 수 있는 건 없었다. 

최지윤과의 연결 고리가 그 정도밖에 없다면 그냥 그 발언도 우연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참석자 명단과 그날의 기억에 매달렸던 일이 헛수고가 되어 버려 기운이 쭉 빠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희민이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하자 정혁이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에게 손목이 잡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희민이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정혁이 오히려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뭐지?



멈칫한 희민이 자신의 손목을 힘주어 잡은 그를 의아스럽게 바라봤다. 정혁이 표정 없이 내려다보다 말했다.



“그만 돌아가죠.”


“네?”



그가 그대로 손목을 잡고 몸을 돌리자 희민이 눈이 커졌다.



아직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간다고 하니 이상했다.

차 실장에게도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참석하기 위한 일정은 아닌 걸로 들었는데.



“벌써 가는 거예요?”



희민이 이상해서 정혁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 말에 그가 멈춰 섰다. 

그녀에게 돌아선 남자의 얼굴에는 방금 전보다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종종 그의 얼굴에 가면처럼 떠올라 있는 미소가 차갑게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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