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야설

외로운 여자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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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벗겨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나만의 문을 통해 거실로 나왔다. 하반신이 마비되는 것 같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현기증을 느껴 벽을 붙잡고 걸어간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 놓고 매달린다. 내 몸의 세포들이 모두 오염된 것 같다. 탕녀처럼 천박해진 음부를 문질러 낸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오열의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길지 않은 시간에 세 남자가 내 보지를 헤집어 놓았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지키느라고 허기진 시간을, 현우를 통해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포만감과 황홀함을 저버리지 못해 놈의 치욕스러운 요구를 승낙한 것이다. 



오늘 하루를 잊어버리고 싶다.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다. 남편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현우를 놓치기 싫어 그놈의 욕정을 채워주는 대상이 되어버린 오늘을 잊을 수가 없다. 그중에도 특히 현우가 원망스럽다. 



문득 친정에 맡긴 민호가 떠올린다. 내가 의지할 유일한 핏줄인 아들마저 누군가에게 빼앗길 것 같다. 세면장을 나와 옷을 걸치고 집을 나와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어머니가 내 모습을 보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별안간 나는 미친 여자처럼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민호가 보고 싶어서 뛰어와서 그런다고 했다. 



민호는 잠들어 있었다. 민호를 끌어안고 나오는데 눈물이 솟구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친정어머니를 뒤로한 채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뒤쫓아 오는 것만 같다. 현관문을 잠근 후, 잠든 민호를 눕히고 나서야 안심이 되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세 남자가 쏟아낸 몸속의 분비물이 자궁 속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느낌이다.



하늘에서 빗줄기가 눈물처럼 끊이지 않고 쏟아진다. 어둠 속을 향해 답도 없는 무수한 질문을 던진다.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간 현우는 어둠이 거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치고 햇살이 창문에 가득하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내려 감긴다. 나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시체처럼 민호 옆에 쓰러진다.



꿈속에서 나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내 몸을 휘감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들을 뿌리치려고 해도 점점 더 만은 뱀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뜬다. 나를 흔들며 배고프다는 민호의 목소리였다. 몽유병자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민호의 식사를 차려주고 거실 소파에 쓰러진다. 그리고 또다시 진흙탕 속에 빠져든다. 



진흙탕 속에서 나를 일으킨 것은 민호의 배고프다는 투정이다. 정오가 지나고 있음을 알고 일어서려는데 현기증이 몰려왔다. 거실과 방바닥에 민호가 혼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아침에 밝게 비치던 햇살은 사라지고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날씨이다. 여름이건만 어깨가 시리고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한기가 엄습한다. 모포를 뒤집어쓴 채 소파에 앉아 민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아들이지만 엄마를 괴롭히지 않고 혼자 놀고 있는 민호가 애틋하기도 하고 고맙다.



나는 아무래도 잠자는 병에 걸렸나 보다. 또 눈을 감고 쓰러졌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누군가 잠긴 현관문을 시끄럽게 두드린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지난밤에 들어오지 않은 현우였다.



문을 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변한다. 옷이 피투성이 된 그의 표정은 쫓기는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보니 전쟁터에 다녀온 모습이다. 찢겨나간 셔츠와 바지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의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대문을 힐끗거리며 살피는 그가 술 냄새를 풍기며 두서없이 중얼거린다.



“누나! 나 좀 도와줘….”


“무슨 말이야? 우선 씻기부터 해….”



현우의 손을 잡아끌고 집 뒤로 돌아갔다. 셔츠와 바지 벗는 것을 도와주는 동안에도 그는 두려운 눈빛으로 대문 밖을 바라본다. 팔과 손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세면장 안으로 그의 등을 밀어 들어가게 했다. 피 묻은 셔츠와 바지를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세면장에서 나온 현우의 몸에 술 냄새와 함께 아직도 비릿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후들후들 떨면서 옷을 걸쳐 입은 그가 대뜸 내 앞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더듬거린다.



“그, 그놈을 죽였어….”


“뭐라고? 누굴? 거짓말이지?”



그의 말을 듣고 온몸이 오싹하였다.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람을 죽일 성품은 아니다. 내 믿음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떨리는 그의 입술이 움직인다.



“은석, 그놈…. 은정 오빠….”


“정말이야? 아니지?”


“그, 그놈이 한 번만으로 안 된데…. 나쁜 놈! 필요할 때마다 만나게 해달라는 거야. 아니면 흔적도 없이 기철이와 나를 죽인데.”


“…?”



별안간 속에서 구역질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저주와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배구부 동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그놈들 패거리에 도전하기로 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국은 이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고, 동료들도 피해 볼 것 같아 나 혼자 처리하기로 했어. 그래서 그놈을 불러내어 죽여 버렸어….”


“바보, 미친….”


“아무도 내가 죽인 걸 몰라. 다만 누나가 말하기에 달렸어.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고 하면, 아마도 믿을 거야. 경찰에서 찾아오면 집에 있었다고 누나가 말해 줘. 그럴 수 있지? 누나를 믿어…. 사랑해.”


“…?”



나는 할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현우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불안한 모습이다. 방안을 맴돌며 안절부절못한다. 그가 방구석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앞에 멈추어 섰다.



봉지를 집어 들고 망설인다. 방문을 나서며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이걸 없애야 해! 없애고 올게….”


“….”



그가 방을 나가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막막하다. 두렵고 겁에 질린 상태에서 방에서 나와 집 모퉁이를 돌아 현관으로 들어왔다. 



나에게 치욕을 안겨준 그놈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으로 현우가 내 곁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현우와의 인연을 악연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나의 잠재된 본능을 일깨우고 희열을 안겨준 그가 나는 필요하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득 내가 정말 이혼을 원하는지 의문스럽다. 이혼을 감당할 자신이 나한테 있기는 한지, 현우가 정말 남편과 이혼할 만큼 내게 귀중한가….내 몸속 세포 세포마다 그의 체취로 가득하다. 그에게 안겨 쾌감에 젖어있는 그 순간만은 남편을 기다리느라 허기졌던 아픔도 잊을 수 있다.



밖으로 나갔던 현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뒤편으로 돌아간다. 빗방울이 또다시 후드득 떨어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바람이 복잡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혼란스러움이 지워지고 상쾌해지는 이 이유를 모르겠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잡아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 액정 화면으로 보니 두 사나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현우의 말을 떠올리며 긴장한다.



우산을 받처 들고 정원을 지나 대문 앞에 섰다. 대문의 쇠창살을 마주하고 두 남자가 서 있다. 앞선 사나이는 점퍼를, 뒤편의 체격이 큰 사나이는 티셔츠를 걸쳤다.



“누구세요?”


“시경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협조하여 주십시오.”



대문을 열고 나선다. 



점퍼를 입은 사나이가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그리고 신분증을 확인 할 사이도 없이 집어넣는다. 



“무슨 일 때문인데요?”


“이 집에 장현우라는 분이 살고 있지요?”


“네, 그런데요?”


“장현우 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 한집에 살아도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니, 잘 볼 수 없어요.”


“지금 집에 있습니까?”


“네,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시죠?”


“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만나 볼 수 있을까요?”



형사의 시선이 내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 같다. 니트웨어를 여며 가슴을 가리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마치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그러세요.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정원을 지나 집 뒤로 향한다. 공연히 뒤따라오는 형사들의 시선이 내 엉덩이에 쏠리는 것 같다. 



현우의 방 현관 앞에 다가서서 문을 두들겼다.



“학생! 안에 있어?”


“….”


“학생, 손님이 찾아왔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피 묻은 옷이 담긴 봉투를 없애고 온다면서 나갔던 현우가 다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답이 없다. 뒤로 돌아보니 형사들은 다시 시도해 보라는 눈치다.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고 일어난 것처럼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도 나처럼 연기를 하고 있다. 



“네, 아주머니…. 무슨 일이시죠?”


“손님 오셔서….”



태연한 표정을 짓지만, 현우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친다. 



그가 나의 뒤편에 선 형사들을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형사가 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해서 선다.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형사가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시경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장현우 씨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사건을 수사 중인데 협조하여 주십시오, J 대학교 학생이시죠?”


“네.”


“같은 대학을 나온 역도선수 출신 박은석을 아시죠?”


“네, 그런데요?”



그들의 말을 듣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지금까지도 현우의 말이 조금은 믿어지지 않았었다. 아니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우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다.



형사가 수첩 하나를 꺼내 살피면서 현우를 예리하게 바라본다.



“오늘 새벽에 박은석 씨가 자기 집 앞에서 피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네? 왜요?”



현우는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우의 냉정함은 연극배우를 뺨칠 정도다. 두 형사의 시선도 그의 표정과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날카로워진다.



“박은석 씨의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사 중인데, 박은석 씨와 후배 간에 문제가 있었던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오늘 배구선수 동료들이 박은석 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알고 있지요?”


“네, 오늘 점심시간에요.”


“장현우 씨도 약속 장소에 갔습니까?”


“아뇨! 저는 몸이 안 좋아 집에 있었습니다.”



대답하는 현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힐끔 나를 바라보는 현우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어 보인다. 이미 나에게 언질을 주었고, 자신의 대답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거 같다.



그러나 형사의 표정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두 형사의 태도가 그를 제압하려는 것처럼 한 걸음 다가선다.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박은석이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던 것 아닙니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약속 장소에 나왔던 동료들은 지금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시간인 오늘 새벽 다섯 시경에 어디 있었습니까?”


“집에 있었다니까요.”



현우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마치 몸도 아픈데, 와서 귀찮게 한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형사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다. 현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형사들이 현관문 앞을 막고 다가섰다.



“집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집 주인아주머니도 알고 있어요.”



형사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송곳처럼 파고든다. 내 가슴의 심장박동 소리가 우산 위에 떨어지는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현우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때 서야 나는 나의 대답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한다. 미간을 찡그린 형사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흐른다.



“주인아주머니는 장현우 씨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셨는데, 오늘 새벽에 장현우 씨가 집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형사들은 아마도 내가 기억을 떠올리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그 순간, 나는 갈등하면서 판단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서인지 형사가 재차 나에게 물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불행하게 사망한 한 사람의 사인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사건을 밝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장현우 씨가 집에만 있었습니까?”


“아뇨!”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대답에 형사들도 현우도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우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현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다. 



그들의 시선에도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냉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 형사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내 대답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저 학생은 어제저녁에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고, 오늘 저녁 무렵에 들어왔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우가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현우와 나를 번갈아 보던 형사들이 재빨리 현우의 양팔을 붙잡는다.



“사건 현장에서 장현우 씨 소지품으로 보이는 손목시계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신을 사건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권한이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한이….”



순식간에 현우가 범죄 용의자로 체포되어야 하는 사유를 형사가 말한다. 



어느 사이에 현우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다. 절망과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현우는 순순히 형사의 체포에 응한다. 나는 망부석처럼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땅위에 다시 굵어진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 속으로 수갑이 채워진 현우와 형사들이 사라진다. 



한편으로는 현우가 수사를 받는 동안 그놈과 같이 나를 유린한 사실을 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가정주부일 뿐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건의 중심에 은정이 있지만, 살인 사건과 무관한 나에 대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사관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현우가 나에게 앙심을 품는다면 그를 영원히 저주하고, 강간을 자행한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울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형사들이 와서 현우의 방을 수색하였다. 그리고 그가 피를 닦아내었던 세면장에서 혈흔을 채취해 갔다. 그리고 이틀 후 텔레비전 사건사고를 알리는 뉴스에 그의 모습이 비추었다. 애인의 오빠인 박은석을 살해한 대학 후배를 검인으로 체포하여 검찰로 넘겼다는 짤막한 소식이었다.



사건이 정리되어 이제 안심하기보다 되레 내 가슴은 허전하였다. 모든 것이 떠나버린 듯 공허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남편을 기다리는 허기짐은 다시 살아나고, 남자의 손길에 길들던 육체는 끝없이 방황한다. 밤마다 고독과 본능의 불길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십여 일이 지나 현우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찾아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의 물건들을 정리해 가지고 갔다.



길지 않은 시간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현우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욕정을 견디지 못해 흘리던 그와 나의 숨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한편으로는 치욕적인 순간들이기에 분노를 느낀다. 여자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짓밟고 내 몸속에 욕정의 분비물을 쏟아낸 그들과 모든 남자를 원망한다. 그러나 정신은 남자들을 저주하지만, 남자들의 손길에 길든 내 육체는 감각의 늪에 빠져 허덕인다. 



남편을 무의미하게 기다리는 시간은 나의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든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잊혀가고 자신을 가두는 자폐증 환자처럼 현실감각도 잊어버린다. 때로는 집안에만 맴도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유일하게 내 곁을 지키는 민호를 데리고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다.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민호였다. 주로 가는 곳은 어린이 놀이터나 공원, 쇼핑을 할 수 있는 백화점 등이다. 하지만 너무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숨어들 듯이 집으로 되돌아오고는 한다.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 나절에 부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느껴진다. 이따금 하숙생처럼 들어왔다가 나가는 남편은 점점 생기가 돌고, 나는 바람도 없는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빈 껍질로 변해간다.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 남편의 생일이 다가온다. 남편의 생일 때마다 시댁 식구들이 방문했었다. 그러나 남편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사실은 안다고 해도 남편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도, 생일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편의 생일 전날 시어머니와 시동생 태영, 그리고 결혼해서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 유나가 찾아왔다. 예기치 않은 그들의 방문에 어리둥절하였다.



“웬일이세요?”


“뭐? 웬일이냐고?”



시어머니는 남편의 생일날도 모르고 있는 나에게 어처구니가 없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가정에 충실치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 이내 정색하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그래, 얼마나 고생스럽니? 민호 아비 생일도 됐고, 네도 걱정 되어서 왔다.”


“….”



그때야 나는 달력을 쳐다본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침묵하는 나의 탓인지 분위기가 서먹서먹하였다. 



시어머니와 사촌 동생 유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남편의 생일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와 유나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서 음식을 준비한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 같이 일에만 집중한다. 단지 거실을 지날 때, 민호를 데리고 놀던 시동생 태영이 넌지시 건넨다.



“형수님 몸매는 아직도 처녀 같아요.”


“….”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몸을 훑고 지나는 태영의 눈길을 의식하며 새삼스럽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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