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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야설) 진홍색 단검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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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이 한층 싸늘해진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교차시켜 집어넣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여자 엘프의 집에서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으로 시간을 가늠해본 것에 비하면, 해는 꽤 빨리 떨어져있었다. 

거리는 평상시보다 고요했고, 나는 슬슬 별이 보이기 시작하나 하는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여자 엘프의 그 달콤한 얘기들이 머릿속을 즐겁게 했다. 

찬바람을 좀 쐬며 머리를 식혀서인지 유피에 대한 복잡한 생각보다는 여자 엘프 쪽으로 마음이 굳혀져가고 있었다. 

하나뿐인 인생임을 감안하면 최대한 즐기면서 남들과는 다른 특출한 삶을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잖은가.


더군다나 요즘은 유피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 훈련장에 찾아왔던 날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도 그녀는 마중나오는 일이 없었고, 나도 이젠 굳이 피하려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당연하리만큼 본래 다니는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때문에 멀리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어렴풋이 서 있는 낯익은 모습을 보았을 땐 다른 이유는 제쳐두고 순수하게 놀랐다. 정말 놀랐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채 뒷짐을 지고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저만치 서 있었다. 

나는 순간 다른 길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이미 그녀가 이쪽을 향해 서 있는 걸로 보아 분명 날 눈치챘을 터였다.


굳이 피하는 모습을 보이긴 왠지 꺼림칙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한걸음한걸음 다가갔다. 

유피는 화난 건지 슬픈 건지 미소띤 건지 모를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그녀와 몸 구석구석을 삐걱거리듯 어색하게 걸어가는 나. 다가갔을 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내 쪽이었다.


“안녕?”


“안녕.”


덤덤히 응수하는 유피. 나는 순간 그녀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말없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 착각을 지적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밥 먹었어?”


나는 슬쩍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가 왔던 방향을 응시한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대답 안 하기도 뭣해서 꽤나 오래간만에 적당한 톤을 좌표로 맞추고 내뱉었다.


“응.”


그리고 다시 재촉하는 걸음. 자꾸 이랬다저랬다 갈등하기도 이젠 피곤했다. 

찬 밤바람은 내 몸을 귀찮게 했고, 얼른 집에 가서 쓰러져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용건이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 듣고 싶었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붙잡음은 잊고 있던 무언가가 전달되듯, 익숙한 그녀의 힘임을 인지했다. 

나는 피곤함에 따른 육체적 명령을 무시한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간만에 보는 유피의 짙은 파란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만 있다 가지 않을래?”


“글쎄.... 식사는 했다니까.”


“이미 차려 놓았어. 조금이라도 맛보고 가.”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이러지 않을 법한 무언가 강력한 권고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피는 그대로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았고, 나는 볼을 긁적이며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 했다.


“그래.... 그럼 좀 맛보고 가볼까.”


---------------


천장에 달린 조그만 등불이 은은하게 밝히는 방. 나는 오래간만에 밥맛이 돌고 있었다. 

정말 얼마만인지 모를 정도다. 

그녀가 차려준 찌게와 스프, 쌀밥은 그리 크지 않은 식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만감을 한껏 제공할 만큼 맛있는 정식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수저를 놀렸다. 그렇게 한껏 식욕의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때때로 밥을 먹었다는 대답이 거짓말로 탄로나지 않았을까 싶어서 유피를 흘낏흘낏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미소띤 얼굴로 찬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돌그릇에 마늘을 빻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다 곧 참으로 시시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단 걸 깨닫고는 배부를 때까지 한껏 수저를 놀렸다.


“휴우, 뭐야. 맛있잖아.”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잘 먹었다는 의미로 배를 쓰다듬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어째 요리 솜씨가 더 는 것 같다?”


하지만 식탁을 치우는 유피는 여전히 편안한 미소로 일관. 나는 그만 멋쩍어져 머리를 긁으려 했고, 그러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차 한 잔 먹을래?”


“어? 어..... 그럼 고맙지.”


“오렌지 차로?”


“응. 꿀은 조금만 놓고.”


나는 그녀가 물을 끓일 동안 문득 나도 모르게 일상적인 취향을 그대로 요구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보름 가량 연락을 아예 끊고 지내다시피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이 익숙한 분위기는.... 

나는 유피의 눈치를 살피려 벽에서 등을 떼 상체를 조금 세웠으나, 뒤돌아 앉아서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볼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뒤돌아 앉은 채로.


“요즘 검 수련은 어때?”


“어, 어.... 그냥 그렇지. 거의 마무리 단계니까 자세만 제대로 교정 중이야.”


“힘들지 않아?”


“별로.... 이젠 아예 익숙해졌달까? 하하.... 그 무서운 교관도.”


교관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웃는 듯한 동작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때 내가 팔을 굽혀 보이며 ‘삶에서 견지해야 할 아름다움 어쩌구....’했던 것을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얼굴이 좀 붉어진 채 시선을 옆으로 슬쩍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차 맛을 우려내는 데만 열중하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또 먼저 꺼내어진 그녀의 말.


“....지난번에 이상한 얘기 했던 것 미안해.”


보름이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는 ‘지난 번’이 언제인지를 한번에 떠올리고 있었다. 나 또한 꺼림칙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때였으니까. 

그녀는 숨은 몰아 쉬듯 한번에 조금 길다싶은 문장을 뱉어내었다.... 아무래도 나를 만나면 해야겠단 얘기를 줄곧 머릿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던 듯하다.


“나는 그저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무언가 내가 도움이 될만한 걸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지나쳤나 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네 미소를 보아야만 안심되고 다행이라고 했던 것.... 

내 자신의 이기라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난 단지.... 오래고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뿐이야.”


격앙되는 말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려 하면서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유피.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의 ‘이해할 수 없다’는 건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왜 그녀가 사과하고 있지? 잘못하는 건 나 아닌가? 왜 유피가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나는.........


“아 참, 차 식겠네. 여기.........”


감정을 겨우 추스른 듯한 그녀는 서둘러 접시에 찻잔을 들어올렸고, 나 또한 그냥 듣고 있었다는 태도를 연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서 내게로 한두 발자국 다가오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툭 하고 물어봤다.


“정말 그것으로 괜찮아?”


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이라는 게 어떤 의미의 관계를 말하는 건지 유피는 대번에 짐작해버린 듯했으니까.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순간 발을 휘청거렸다. 어.... 어?


떨어져내리는 찻잔.


쨍그랑-.


“아.........”


“이.... 이봐, 괜찮아 유피?”


나는 얼른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당황해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옆의 아무 수건이나 들어 바닥을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칠칠맞지 못하게.... 이건, 저.....”


“데이진 않았어? 다친 데는?”


“다시 새로 끓여줄 테니까.....”


“손 좀 봐.”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끌려 했으나 유피의 팔은 그녀의 의지로 완강하게 고정돼있었다. 

나는 찻잔이 깨질 때보다 더욱 놀랐고 그것은 그녀의 젖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괜찮으니까!”


눈........ 물?


내게서 얼굴을 반쯤 돌린 유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참으려는 의도가 역력했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 따윈 비웃기라도 하듯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엉망진창으로 젖어버린 바닥 위로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유피를 끌어안았다. 자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그녀가 걱정하는 걸 말할 순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을 뿐이었다. 

침묵으로 일관된 적막함 속에서 유피의 흐느낌만 귓가를 어지럽혔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흐.... 흣......... 흑.........”


------------------



보름달에 가까워지는 밝은 달빛이 등불 하나 없는 골목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달빛이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유피의 손을 차마 먼저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다. 

정적이 길어지자 유피는 얼른 자기 쪽에서 손을 빼었다. 나는 무언가 지탱하던 사슬이 끊긴 것처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유피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외로 강한 면모도 있는 여자다. 하지만 여전히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다. 

유피는 일부러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시간을 가늠하는 듯했다.


“늦었지. 얼른 돌아가 쉬어.”


“응.........”


문득 고개를 돌린 그녀의 머리 한쪽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눈빛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머리핀.....’


내가 유피에게 선물했던 것. 언제 사준 건지 기억도 안 났다. 해를 거듭할 정도로 오래 전 일이니. 하지만 분명했다. 

그저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눈에 띈 장물상인에게서 별 생각 없이 사주었던 것이다. 저걸 아직까지.........

나는 몸을 돌리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피에게서 멀어져 갈수록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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